산업부, 호르무즈 리스크에 ‘에너지 외교’ 총력…주요국과 릴레이 회담
사우디-UAE, 대체 항로 요청…카타르, LNG 장기계약 이행 당부 IEA 공동 비축유 방출 공조 속 한국도 2246만 배럴 방출 계획
중동 정세 장기화로 글로벌 원유·천연가스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정부가 주요 자원 공급국 및 에너지 협력국들과의 연쇄 외교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유럽연합(EU), 필리핀 등 주요국 자원·에너지 담당 장관들과 잇따라 양자 회담(화상 또는 유선)을 갖고, 글로벌 자원 공급망 위기 대응과 에너지 수급 안정화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이는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도-태평양 에너지 안보 장관회의’를 계기로 미국·일본 등과 양자 협의를 진행한 데 이은 후속 대응이다.
이번 릴레이 회담은 단순한 외교 일정 차원을 넘어,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가 한국의 원유·LNG 도입 구조와 석유제품 수출 전반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에너지 외교 총력전’ 성격이 짙다.
정부는 특히 최근 중동 긴장 고조로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불안정성이 장기화할 경우, 한국의 에너지 수급은 물론 아시아 전체 공급망에도 연쇄 충격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산업부는 회담에서 “석유·가스 등 자원 안보는 더 이상 단일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산업과 공급망이 긴밀히 연결된 공동의 과제”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입 구조를 보면 중동 의존도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산업부 참고자료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의 원유 수입 1위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3억4540만 배럴(32.6%)에 달했고, 미국 1억7490만배럴(17.0%), UAE 1억1700만배럴(11.4%)이 뒤를 이었다. LNG 수입의 경우 호주가 1470만톤(31.4%)으로 가장 많았지만, 카타르도 700만 톤(14.9%)으로 핵심 공급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석유제품 수출에서는 호주, 싱가포르, 미국,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태평양 시장이 주요 판로를 형성하고 있어, 중동발 공급 충격은 수입과 수출을 동시에 흔들 수 있는 구조다. 참고자료 1쪽 하단 통계표는 이러한 구조를 한눈에 보여준다.
정부는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와 LNG의 약 80% 이상이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전체 원유 수입의 약 70%를 중동산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 때문에 해협의 긴장 고조는 단순한 운송 차질을 넘어 국내 정유·석유화학·발전용 연료 수급 전반과 연결되는 구조적 리스크로 인식되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이 글로벌 석유제품 공급망의 주요 수출 허브라는 점에서, 국내 원유 도입 불안정성이 커질 경우 해외 수요처의 공급망에도 직접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게 산업부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김 장관은 사우디와 UAE 측에 한국 기업들이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대체 항로를 통해 원유를 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구체적으로는 사우디의 얀부(Yanbu)항과 UAE의 푸자이라(Fujairah)항 등을 활용한 원유 확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동산 원유 의존 구조를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우회 공급망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카타르와의 협의에서는 LNG 수급 안정성이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김 장관은 카타르 측에 그간 한국에 대한 안정적인 LNG 공급에 사의를 표하면서, 이란 인근 카타르 라스 라판(Ras Laffan) LNG 생산시설이 중동 상황으로 영향을 받더라도 한국과의 장기 도입 계약이 차질 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한국이 겨울철 및 전력 피크 시기에 LNG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협의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보다 실질적 공급 안정성을 겨냥한 요청으로 해석된다.
EU와의 회담에서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공동 비축유 방출 조치가 핵심적으로 논의됐다. 김 장관은 댄 요르겐슨 EU 에너지 집행위원에게 IEA가 결정한 총 4억3000만 배럴 규모의 공동 비축유 방출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하며, 이번 결정 과정에서 EU가 수행한 역할에 감사를 표했다. 동시에 한국 역시 과거 글로벌 원유 수급 위기 시 총 5차례 공동 비축유 방출에 동참한 경험을 상기시키며, 이번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와 민간이 함께 역대 최대 수준인 2246만 배럴 규모의 비축유를 방출할 계획임을 설명했다. 이는 국제 공조 속에서 한국도 단순 수혜국이 아니라 공급망 안정에 기여하는 핵심 플레이어임을 부각한 대목이다.
필리핀과의 협의에서는 한국의 석유제품 수출 관리와 역내 공급 안정이 함께 논의됐다. 김 장관은 필리핀 측에 최근 정부가 국내 석유제품 시장 안정을 위해 한시적 최고가격제와 수출 관리 조치를 병행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번 수출 관리가 전면 통제 조치가 아니라 예년과 유사한 수준에서 수출이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국내 유가 안정을 우선하되, 필리핀 등 주요 수출국과의 공급 신뢰도는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산업부는 이번 릴레이 회담을 통해 한국이 단순히 중동발 공급 충격을 방어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산업·자원 밸류체인의 핵심 거점 국가로서 공급망 안정에 적극 기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평가했다. 김 장관은 “대한민국은 글로벌 산업·자원 밸류체인의 핵심 거점 국가로서 국내 수급과 민생 안정은 물론, 전 세계 공급망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중요국들과의 양자 및 다자 협력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행보는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에너지 수급 대응 체계가 단순 비상 대응을 넘어 외교, 비축유, 수입선 다변화, 대체 항로 확보, 수출 관리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자원안보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도 읽힌다. 특히 중동발 리스크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향후 한국의 에너지 외교가 산유국·소비국·국제기구를 동시에 연결하는 ‘다층형 공급망 외교’로 한층 강화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