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에너지부(DOE)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원전 인허가 문서 작성 절차를 대폭 단축할 수 있다는 실증 결과를 공개했다. 차세대 원전 상용화의 최대 병목으로 꼽혀온 규제 및 인허가 절차에 AI를 본격 접목하려는 시도로 향후 미국의 첨단원자로 상용화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DOE는 지난 26일(현지시간) 아이다호국립연구소(INL), 아르곤국립연구소(ANL),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에버스타(Everstar)와 협력해 AI 도구를 활용한 원자력 규제 절차 간소화 실증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DOE에 따르면 이번 작업은 첨단원자로 실증사업에 적용되는 DOE 내부 안전분석 문서를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상업용 인허가 문서 형식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수행됐다.
핵심은 원자로 개발자가 정부 실증 단계에서 작성한 안전성 문서를, 상업 배치를 위한 NRC 인허가 신청서 수준으로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전환할 수 있느냐에 있다. DOE는 이번 실증이 원자력 기술 인허가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높일 수 있는 AI의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장기적으로는 첨단원자로의 상업 배치 시점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실증에는 에버스타의 ‘고디언(Gordian)’ AI 솔루션이 활용됐다. 이 솔루션은 마이크로소프트 애저(Azure) 플랫폼 기반으로 구축됐으며, DOE 산하 국가원자로혁신센터(NRIC)의 고온가스로(HTGR) 관련 ‘예비 문서화 안전성 분석서(Preliminary Documented Safety Analysis)’를 NRC 인허가 신청서에 상응하는 문서 섹션으로 변환하는 데 사용됐다. 에버스타(Everstar)는 원자력 인허가 및 규제 대응 문서 작성을 AI로 지원하는 미국의 신생 기술기업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작업 속도다. DOE는 최종 결과물이 208쪽 분량이었으며, 이 문서를 생성하는 데 단 하루가 걸렸다고 밝혔다. 통상 동일한 작업에는 여러 명으로 구성된 팀이 4~6주를 투입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AI를 활용한 문서 전환이 인허가 준비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DOE는 단순히 문서 작성 속도만 빨라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AI는 NRC 신청서 작성에 필요한 정보 가운데 누락되거나 불완전한 부분도 함께 식별해냈다. 이는 향후 원전 사업자가 인허가 신청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보완 요구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에버스타는 고디언이 원자력 수준의 기술 문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물리ㆍ공학 도구와 의미론적 온톨로지 매핑(semantic ontology mapping) 기능을 탑재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결과물이 단순 추론이 아니라 계산ㆍ검증 기반으로 생성되도록 설계됐다는 것이다.
다만 DOE는 AI가 인허가 전문가를 대체하는 개념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번 접근 방식의 원칙은 ‘전문가가 설계하고 AI가 속도를 높이며, 다시 전문가가 검증한다’는 구조다. 실제로 AI가 생성한 문서는 이후 전문가 검토를 거쳐 ▲정확성 ▲누락 여부 ▲일관성 ▲문법 및 구조 등을 점검받았으며, DOE는 그 결과가 상당한 수준의 품질과 깊이를 보여줬다고 밝혔다.
라이언 바란(Rian Bahran) DOE 원자로 담당 부차관보는 “지금이야말로 AI로 가속화된 원자력에너지 배치에 과감히 나설 때”라며 “이번 협력은 단순한 생산성 향상을 넘어 업계가 안전과 규제 준수의 최고 기준을 유지하면서도 규제 제출 문서를 준비하고 원자력에너지를 배치하는 방식을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케빈 콩(Kevin Kong) 에버스타 최고경영자(CEO)는 “원자력은 오늘날의 중대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규제 검토와 상용화를 가속하기 위해 INL과 협력하게 돼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카르멘 크루거(Carmen Krueger) 미국 연방부문 부사장도 DOE 및 산업계와의 협력이 안전하고 확장 가능한 AI 기술을 에너지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DOE는 현재 원자력 인허가 절차가 여러 차례의 수작업 문서 검토와 사소한 행정 수정 과정을 반복하면서 수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이번 HTGR 사례는 AI가 이러한 절차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신 사례라는 설명이다. DOE는 올해 초 INL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협력해 건설허가 및 운영허가 신청에 필요한 공학ㆍ안전성 분석 보고서 생성에도 AI를 적용하는 실증을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더 나아가 NRIC의 최근 연구에서는 AI가 문서 개발 시간과 규제 검토 주기를 최대 50%까지 단축할 잠재력이 있으며, 동시에 정확성과 일관성 및 추적 가능성까지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AI가 원전 산업의 ‘설계·운전 보조’ 수준을 넘어 향후 규제 대응과 상용화 전략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DOE와 연구진은 향후 AI가 생성한 문서를 NRC 가이드라인에 맞춰 검증하는 리뷰 체계를 강화하고, 고디언의 성능에 대한 신뢰도 등급(benchmarking rubric)도 마련할 계획이다. INL 역시 연료 제조시설 등 다른 원자력 분야로 AI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자체 도구 개발을 진행 중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 중인 국가 AI 혁신 구상인 ‘제네시스 미션(Genesis Mission)’과도 맞물린다. DOE는 최근 이 프로그램 아래 총 2억9300만 달러 규모의 경쟁형 연구개발 자금을 발표했으며, 이 가운데 하나의 핵심 과제로 원자력에너지 배치 가속화가 포함됐다고 밝혔다.
원전업계에서는 이번 사례가 미국의 첨단원자로 정책이 단순한 기술개발을 넘어 실제 상용화 단계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규제 및 인허가 병목 해소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SMR과 고온가스로 등 차세대 원전의 경우 설계 혁신만큼이나 인허가 문서화와 규제 대응 역량이 사업성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는 만큼 AI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